배우 남궁원도 매주 몸을 맡긴 월 1200만원 벌던 때밀이 전설(중앙일보)

배우 남궁원도 매주 몸을 맡긴 월 1200만원 번 때밀이 전설 [중앙일보] 입력 2020년 12월 08일 05:00

한화리조트 산정호수온천 사우나 때밀이 김승철(가명).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본명을 숨기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43년 경력의 장인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프롤로그를 인터뷰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 나이로 72세. 43년을 한 직업으로 살았지만 장안의 높은 사람들이 허구의 날을 세우며 한창 월수입 1200만원도 기록했지만 세상의 시선이 여전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10여 년 전부터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마침내 그가 인터뷰를 허락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얼굴이 보이는 사진이 아닌 본인을 특정할 수 있는 일부 사실은 숨기고 본명도 숨기기로 했다.경기 포천 한화리조트 산정 호수 안시의 때밀이 김승철 씨(가명71)가 탄생했다. 흔히 ‘세신사’라 불리는 것도 알고, ‘목욕관리사’라는 명칭도 알고 있지만 때밀이라고 쓴다. 국립국어원이 이 단어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때밀기라고 써 이 단어에 대한 편견과 무시의 시선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듣고 싶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의 지친 몸을 달래 본 적이 있는가.

1막: 그늘에서 일하고 싶었다

김승철 씨(가명)의 1평 남짓한 작업공간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승철 씨는 1949년 전남 장성 소작농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더디고 가난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땡볕에서 일했지만 나아질 게 없었다. 무기력했던 날들 소원은 하나였다. 뒤에서 일할 수 있다면.

열여섯 살에 고향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친구 다섯 명과 상경을 결의했다. 부모가 반대했다. 열흘 가까이 음식물을 전폐하고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부모는 아들의 상경을 허락했다. 아들이 떠나기 전 어머니가 병아리 한 마리를 삶아 주었다. 그때 먹었던 백숙의 맛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여름날 소년은 완행열차에 올랐다. 가방에는 책 8권이 들어 있었다. 좋은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책이다.

서울 삼양동 의류공장에 들어섰다. 일손이 부족했던 시절 기계 돌리는 법만 익히면 일할 수 있었다. 서울 제기동 자취방에서 1시간 동안 걸어서 출근해 기계 앞에 서서 14시간을 일했다.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했지만 방값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아는 사람을 통해 잠실 아파트 단지 목욕탕에 취직했다. 1978년의 일이다.

첫손님을 잊을수가 없다. ‘김사장’은 초보자의 때밀이 서툰 손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2만원을 쥐여줬다. 차마 돈을 받을 생각도 없었는데.. 김 사장은 그 후 오랜 세월 단골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평생 목욕탕에서 밥을 벌다니. 하루하루 살아왔을 뿐이다.

2막 : 월수입 1200만원 시대

한화리조트 산정 호수온천 사우나 남탕 풍경. 지난 12월 4일 방문했을 때 영업이 중단된 상태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잠실아파트단지목욕탕(1978) →서울특급호텔사우나(1982) →잠실오금프라자사우나(1990) →한화리조트 산정호수온천사우나(2000)

김승철 씨는 사우나 업계의 전설이다. 43년간 자리를 지킨 사람도 드물어 8090년대에는 때밀이 장인으로 소문났다. 호텔에서는 정확히 매일 30명씩 손님을 맞았다. 요금 4만5000원 중 1만5000원이 김 씨 몫이었다. 이렇게 하루 45만원, 한 달에 1200만원이 넘는 현금이 들어왔다. 평일에는 일본인 관광객, 주말에는 정치인과 기업인이 찾았다.

손님 1인당 20분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에 손님 30명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하루에 10시간씩 때를 밀었다는 뜻이다. 저녁에는 몸무게가 2kg씩 빠졌다. 점심에 제대로 먹지 못한 밥을 허겁지겁 먹고 자면 다음날 체중이 돌아왔다. 그렇게 8년간 살아왔다.

지금은 그때처럼 벌 수 없다. 때밀이뿐 아니라 사우나 운영·관리도 맡았지만 수입은 한창 절반도 안 된다. 코로나 사태를 맞은 올해는 그 절반도 안 된다. 수입이 너무 줄어 서울 집 아내가 “두 집 사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요즘은 주말이면 아내와 아들이 일을 도와주러 온다. 산정 호수의 풍경이 어린 시절 떠난 고향처럼 편안하다.

3막 남북 정상회담 다음날 걸려온 전화

43년 경력의 때밀이 장인 김승철(가명) 씨의 손. 손이 유난히 크고 두툼하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2000년 6월 16일 예약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다. 서울공항에서 출발할 테니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오랜 단골이었다. 평소 목 뒤가 딱딱해 다른 손님보다 시간을 들여 마사지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김 위원장이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돌아오자마자 달려갔다니. 지친 기색이던 그를 돌보는 사이 긴급전화가 들어왔다. 어깨너머로 묻자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때를 밀지 않아 그는 1시간 넘게 통화했다. 다른 손님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통일될 줄 알았다.

연예인 단골 중에는 남궁원 씨가 생각난다. 얼굴을 수건으로 감싸고 나타났다. 심지어 한쪽 눈도 가렸다. 튀는 것을 그렇게 꺼리면서도 매주 때를 밀었다. 돌아가신 원로 가수도 생각난다. TV에서 볼 수 있는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 늘 특혜를 요구하며 자랑만 늘어놓았다. 팁은커녕 음료수 한 병도 사주지 않았다. 오금동 시절 매일 때를 미는 노인이 있었다. 90년 오금동을 떠났을 때 83세라고 했으니 지금은 돌아갔을 것이다.

조폭 단골도 많았다. 오랫동안 부산 칠성파가 단골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 사우나가 하루아침에 목포파 세상으로 변했다. 다들 몸집이 크고 문신이 많아 다른 손님들 눈치가 보였는데 팁을 충분히 줘서 고마웠다. 일본 야쿠자의 단골손님도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다른 조폭들이 금세 사라졌다.

4막: 장인의 루틴

김승철(가명) 씨가 때밀이 요령을 가르치고 있다. 수건을 감았을 때 수건을 살짝 누르면서 누르면 아프지 않고 때가 잘 나온다고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오른손, 왼손, 왼쪽 옆구리, 등, 오른쪽 옆구리, 앞면. 이 순서대로 누릅니다. 여기까지 15분 걸립니다. 삭발하지 말고 살짝 눌러주세요. 그러면 아프지 않고 피로가 풀립니다. 수건 앞을 살짝 들어올려 누르면서 눌러야 돼요 다음에 비누칠해서 배 마사지를 할게요. 거품 타월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00회 정도 마사지하면 2분 정도 걸립니다. 다음으로 등을 비누칠해서 마사지합니다. 등 왼쪽과 오른쪽, 중앙을 7회씩 합쳐서 3회 반복 마사지 합니다. 등 마사지도 2분정도 걸립니다. 다 합치면 20분이 됩니다. 왜 기억이 안 나요? 평생을 이렇게 했는데. 누구나 똑같이 했는데.”

그는 때밀이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특별한 기술은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열심히, 정성껏, 성의 있게. 이 단어를 수십 번 썼다. 대기객이 많았으면 대충 할 수도 있었을 텐데 1시간에 4명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한다. 그의 작업장에는 오래전에 산 손목시계가 놓여 있었다.

요즘은 요금을 2만원 받아요. 20분에 2만원이니까 1분에 1000원 정도잖아요. 힘들고 어렵다면 1분에 1000원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해 주세요.

에필로그

사우나 작업장에 놓인 김승철 씨(가명)의 시계. 김씨는 ‘손님 1인당 20분’을 원칙처럼 지켰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인터뷰는 12월 4일 온천 사우나에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였지만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지난 12월 1일부터 시행된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조치로 사우나가 폐쇄됐다. ‘목욕 허용, 사우나·한증막 금지’ 방침이 내려지자 한화리조트는 온천 사우나 폐쇄를 결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일 한화리조트는 김 씨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달부터 그는 21년간 근무했던 직장에서 나와야 한다. 김 씨는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 일만 하고 놀지 못해요. 비행기도 타본 적이 없고 제주도에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일을 안 하면 아파요.

목욕은 위생활동 이전에 종교 제안이었다. 죄를 씻는 의식으로 인간은 몸을 닦았다. 때밀이라고도 한다. 남의 잘못을 씻듯 신성한 노동이 또 있을까. 그가 내 일이 자랑스러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열심히 살아왔다는 말은 할 수 있다. 유난히 두툼한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송민호 기자 [email protected]

http://naver.me/5AeA8OSq 프롤로그를 인터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 나이로 72세. 43년을 한 직업으로 살았지만 장안의 높은 사람들이 허무한 날 줄을 서며 한창 월수입 1200만원도 기록했지만 세상의 시선이 여전히 불편했던 Mnaver.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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