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서 외국 엔지니어들과 회의를 할 때마다 영어가 잘 안 들려서 회의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시도한 것이 시트콤을 활용한 영어 공부였고 교재는 프렌즈였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틀어놓고 귀에 들리는 부분만 받아쓰는 연습을 했는데 시트콤이라는 게 편당 30분 정도여서 분량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미국 시트콤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영어 공부에 안성맞춤인 드라마였다.
프렌즈 종영 이후 또 다른 시트콤을 찾아봤지만 프렌즈만한 작품은 찾지 못했고 그 뒤로는 일반 드라마를 틈틈이 뒤졌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부터 주변에서 빅뱅 이론이라는 시트콤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고 당시 마땅히 보던 미드나이트도 없어 한 시즌을 시도했지만 3편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빅뱅 이론 캐릭터가 너무 낯설어(특히 셸던 캐릭터) 그들만의 유머 코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재미가 없어 포기했다.
그렇게 첫 시도를 포기했지만 문제는 이후에도 빅뱅 이론은 재미있다는 감상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난 분명 별로였는데 남들은 왜 그렇게 좋아할까 싶어 첫 시즌을 다시 억지로 끝까지 감상해 봤다. 1시즌을 무리하게 마치고 2시즌에 접어들면서 빅뱅 이론의 유머코드를 찾기 시작한 듯하다. 공부는 잘하지만 사회성은 좀 부족한 남자 주인공과 배우를 꿈꾸는 이웃 여주인공,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즌을 거듭할수록 재미있어졌다. 처음엔 한 시즌을 보고 가장 거부감을 느낀 캐릭터가 셸던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시즌이 진행되면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셸던이 되고 말았다.
빅뱅 이론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1~2시즌만 무리하게 정주행해 볼 것을 권한다. 초반 시즌만 참고 (주위에 한 시즌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는 친구들을 많이 본) 빅뱅 이론만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 본인 앞에 남은 10개 이상의 시즌이(12시즌 만에 종료) 기다리고 있으니 속아본 셈치고 한번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 “내가 빅뱅이론을 시작했을 때는 마블영화가 유행하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내가 알던 히어로는 슈퍼맨, 스파이더맨 정도?) 아쿠아맨이나 플래시는 전혀 몰랐다.) 빅뱅이론의 주인공들이 히어로들에 대해 논쟁할 때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마블영화에 DC영화까지 많이 개봉되어 미국 히어로들에 대한 정보도 충분하기 때문에 빅뱅이론을 나보다 더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장 좋아했던 시트콤 중 하나가 프렌즈인데 마지막 시즌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들이 각자 갖고 있던 모니카의 집 열쇠를 바구니에 넣어두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을 흘렸다. 프렌즈는 나에게 있어 내 인생 20대를 함께 보낸 드라마로 10년지기 친구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그 친구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너무 아쉬웠다. 빅뱅 이론도 마지막 시즌 마지막 회에서 빅뱅 이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장면(아직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 금지)으로 끝나는데 프렌즈 때처럼 눈물이 났다. 결론? 무조건 추천이다
(추가) 가끔 주변에 미국드라마를 보면서 영어공부를 위해 영어자막을 달아놓아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빅뱅이론은 영어공부를 위한 좋은 교재가 아니게 하고 말리고 싶다. 빅뱅 이론의 경우 생활영어도 대다수이지만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기본적으로 자연과학 분야의 석박사들이어서 그 분야의 전문적인 용어도 많이 나온다. 다만 영어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한글 자막으로 스트레스 받지 않고 그냥 즐기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