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블럭을 좋아한다. 강한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고 예쁘지만 예쁘지 않은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고. 그래서 코미디 장르는 좋아하지 않지만 샌드라 블록이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는 본다. 그래서 #넷플릭스 언포기버블도 보게 됐다.
언포기버블= Un-Forgive-able 용서 못해
우리는 살면서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다 아직 나한테는 그런 사람이 없는데 그런 사람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접할 수 있을까?
◆미국에는 소아성애자나 경찰을 죽인 사람처럼 감옥에서도 역대급 쓰레기로 분류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 영화 언포기버블에서도 그중 하나를 다루고 있다. #경찰관을 죽인 사람, 가석방 보호감찰관은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뒤쫓아 #가스라이팅을 한다.
영화는 매우 어둡다. 웃는 연기가 특기였던 샌드라 브록이 넷플릭스를 만난 뒤로는 늘 웃지 않는 연기를 펼친다. 그래서 낯설지만 산드라블록이라 계속 보고있었다.
이 영화를 포스팅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선택에 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 그래서 이 영화를 포스팅하려고 했어.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하고.
경찰을 살해한 죄로 20년간 복역하다 가석방된 루스는 사회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해오던 본업인 명수를 잃었다. 이미 그녀를 증오하고 있는 누군가의 전화에 그녀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잃었다. 죄를 지은 #죄에 의해
침착하게 어공장으로 향했다. 주어진 일을 처리하면 제대로 돈을 벌 수 있고, 음식을 다루는 직업이라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한겨울 솜잠바를 입고 매일 출퇴근한다.
운 좋게도- 이 영화가 한국어로 ‘포기할 수 없어’처럼- 비영리단체로 노숙인을 위한 쉼터를 만드는 곳에서 투캅을 찾고 있다. 정말 운이 너무 좋았어. 평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여기서 외쳤다. 그렇게 그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드는 듯했다.
얼굴을 맞고 사람들의 경멸을 견디기 전까지는. 동생을 찾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자꾸 돌아서 피하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마다 답답함을 느끼기 전까지는.
언포기버블은 그가 그토록 포기하지 못했던, 지켜야 했던 그녀의 비밀 중 하나를 밝히는 스토리로 영화를 내보낸다. 무심코 뱉어내는 게 아니라 20년 후에 #누구에게나 #말을 했어야 했다는 썸남의 변명이 트리거가 돼서.
나는 어떤 선택도 존중하는 이 영화를 본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이 옳다고 생각한다. 루스와 같은 선택을 해도 옳고 그렇지 않아도 옳다. 그만큼 이 영화는 한 가지 선택을 짊어진 만큼을, 짊어진 무게를 드러내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런 무게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라고
기꺼이 대답할 수 있다. ‘그만해’라고 말해. 하지만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나의 선택은 루스의 선택과는 달랐다. 범죄자는 양육권을 빼앗기기 쉽고, 만 14세 미만 어린이, 특히 만 5세(한국 나이로 7세가 되는데) 어린이의 범죄라면 그 경위로 볼 때 아이의 트라우마도 치료해야 마땅하고 죄도 묻지 않을 수 있다. 평생 법으로 양육권과 대면권을 빼앗긴 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영화를 같이 본 사람은 아이가 가질 트라우마를 걱정했다. 그게 옳아. 하지만 난 내 생각에서 했어. 내가 갖는 박탈감과 외로움을. 아직 난 미숙하고 어려.
용서 못할 사람은 누구였나=넷플릭스 영화 언포기버블은 저마다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다만 범죄자 편을 들어서는 안 되므로 약간 줄타기를 한다. 철저히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배척하고 죄를 벌하려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하다. 영화 지옥의 화살처럼 거짓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 영화는 샌드라 블록(극중 루스)이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본인이라고 말한다. 극중 계속 침체되어 있어, 움츠러들어 사람들과 대화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자신의 머리도 옥죄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는 출소 후에도 자신에게 벌을 주며 다 내 탓이었다고 회고한다.
동생을 말릴 수 없었던 것과 혼자 둔 것. 그런 어린 아이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큰일을 저지른 것이다. 어린 루스가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것은 모두 자신이었다.
누가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자신도 아니고 섬나또도 아닌 그 20년을 버틴 그 누군가였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용서하는 편인가. 아니면 남을 잘 용서하는 편인가.
영화는 용서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을 열어둘 것을 권했다. 범죄자가 아니다. 누구든지 그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하는 귀 기울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멘탈이 약한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흔들리니까 내가 그래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물어보자. 그 다음은 그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