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주의자가 읽기에 아까운 낭만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서양식 과학을 무조건 맹종할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전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파급력을 갖게 됐는지 관찰하고 탐구해볼 필요는 있다.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자체가 학문적 태도다. 신기하고 새로운 현상을 배우고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그 이유를 알기 위해 많은 사람이 수세기에 걸쳐 지식을 쌓는 것, 끊임없이 검증하고 반박하고 새로운 근거를 더하는 것, 나의 생각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을 대학에서 배워야 한다. 58

대학이 이들에게 배운 것보다 배우는 즐거움과 고통을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일깨워 주기 바란다.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눈을 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그 즐거움과 고통을 「우주의 이해」에서도, 「작문의 이해」에서도, 「시민교육」이나 「전자역학」, 「천체물리학 개론」에서도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어쩔 수 없이 대학을 다녀야 한다면 대학졸업장이라는, 그 한없이 틀에 박힌 문서 하나가 주는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칠 수 있기를, 넘쳐나길 바란다. 63-시적 허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배움과 성찰, 낭만을 기대하고 실천하면 바보가 되는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자의 낭만이 너무 태연하게 꾸밈없이 놀랍다.지금보다 취업이 어렵지 않았던 나의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면 더 치열한 전쟁터에서의 투쟁과 이기심으로 뭉쳐 있는 대학생들. 혼족, 혼밥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이라 삼삼오 모여 밥을 먹고 강촌으로 MT를 가서 종강파티를 하던 그 시절은 그나마 남아있던 대학이라는 낭만의 칙함을 최대한 모은 마지막 축제였다.하지만 사람이 올라가면 내가 추락하는 이 어려운 현실에서 그 사회 진출의 출발선에 자세를 잡고 선 출전자들에게 호기심을 잃지 말고 배움의 진수를 잃지 말라는 말은 원칙에 근거한 조언이나 그 무관심함이 읽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석사 이상은 올라가야 효력을 발휘하는 분야가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대부분 학사로 마친 성취를 갖고 사회에 진출한다.교양 수업에서 천문학 강의를 듣는 이런 평범한 학사과정을 마치려는 이들에게도 이 조언은 과연 도움이 될까.

나는 좋아하는 록밴드의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언니에게 강제로 들려주면서 좋지? 괜찮지?”라고 연발하기도 했다.그러자 음악 취향이 나왔고, 꽤 나른한 언니는 어쩔 수 없이 몇 초 듣는지 묻지 않겠다는 듯 “좋아요”라고 짧게 한마디 해 납득해주기도 했다.하지만 내가 그런 상식 없는 일을 몇 년이고 반복하자 어느 날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 아, 내 감동은 나만의 것이었다. 내가 <코스모스>를 읽을 때의 모습은 동생이 달아준 이어폰을 차마 놓지 못했던 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좋은 작품이고 대단하다는 건 알겠지만 뭐 꼭 나까지 그렇게 함께 좋아해야 하느냐는 바로 그 표정이다.칼 세이건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대단한 선동가였다. 85-발칙한 우주 산책

<코스모스>는 과학책이라기보다 과학자가 쓴 인문학 에세이에 가깝다.전문 과학자가 보기엔 이 책은 과학서적보다 멀리 떨어진 칼 세이건의 바람과 꿈이 담긴 한 권의 문학으로 볼 확률이 높다.비이과생에게 이 책은 조금의 어려움만 극복해도 읽을 수 있는 재미와 흥미가 가득 담겨 있다.그러나 그 실체에 비해 <코스모스>라는 책이 다소 과대평가된 것에 동의한다.같은 분야에 있는 과학자들이 보기에는 이 책이 다소 걸리는 것은 이해하지만 뭐, 모두가 (본인처럼) 과학자는 아니니까.

부모 중 한 명이 가사와 양육을 맡거나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조부모 등 친척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녀 한 명을 키우기가 어려운 사회. 그렇다, 현실이 그렇다고 백 번 인정한다. 그것이 현실이지만 그것이 여자들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슬프다.직장에서 그토록 프로페셔널해야 한다면서 가정에서의 의무는 가볍게 보는 아이러니가 뭘까.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문화에 적응해 나가듯, ‘직장맘’들이 ‘자녀는?’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하듯이 그들도 여성들, ‘직장맘’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면 좋을 것이다.108 – 최고의 우주인

육아 부모끼리 남녀 간 분업은 반드시 필요하다.적어도 남성이 2세를 더 원한다면 (임신이나 출산은 여성의 신체적 희생을 요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일터에서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을 구두쇠로 보는 회사와 대부분의 육아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육아의 책임을 여성에게 모두 부여했다면 직장에서의 출산 및 육아 복지 혜택이 풍부해야 하고, 직장에서 성별 구분 없이 프로페셔널함을 요구한다면 사회적으로 육아의 책임을 한쪽 성에 중점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실 ‘자녀’는 가족의 일원을 생산하는 가정의 일이자 사회의 일원을 탄생시키는 사회적 사건인데, 애초에 부모 개인의 선택. 지금에 모든 육아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는 원인은 모든 육아를 ‘부모’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육아 관련 사회적 책임 부재에 있다. 모든 비용과 수고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국가 및 사회가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매우 쉬운 사회적 비용의 해결 방법이다.하지만 간혹 육아에 지친 부모들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고 토로하는 외로움에 가끔 혀를 내두를 때가 있다.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면 주변에서 고생이라는 위로의 말뿐 실제 도움이 없다는 말은 이런 고생을 처음 보는 남들이 도와야 한다는 신기한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아이의 양육 후 오는 성취와 보람은 부모가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 아니거나 남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의아함은 출발한다. 연애, 결혼도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을 주입하는 순간 관계가 왜곡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OO하기를 바라는 이기심은 어디에서, 어떻게 기인하는가-이런 부모들의 이기심이 과도하게 발현될 때 사회문제로 대두된다.저는 그 ‘선택’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 뒤에 올 행복에 대해 냉정하게 인지해야 이런 사회적 문제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조카 바보라는 말이 얼마나 무지하게 들리는지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다. 조카가 ‘아이’가 됐을 때 따라오는 책임감, 그것이 가볍게 사라진, 오로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밝은 면만을 취득해 쫓아낼 수 있는 3촌 이상이 가진 그 특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어쩌면 사람들은 대단한 과학자들을 집중 조명하고 싶어한다.고난을 극복한 영웅담에 빨리 감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과학자를 많이 키우고 그중 한 명이라도 대단한 과정을 지지하거나 지켜보는 것은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어디서 껑충 뛰쳐나올 리 없다.146 인터뷰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방송국 놈들이라는 단어가 통용된다.사실보다 더 부풀리고 극적이고 과대하며 대중에게 제시하고 종종 책임도 포기하는 그 방송국 놈들-한국은 적지만 미국에서 TV라는 간단한 미디어의 의존성은 사실 저소득, 저교육층에서 비례한다.단순한 주입을 요하는 텔레비전은 책과 같은 매체보다 낮은 이해 수준과 높은 접근성을 요하기 때문이다.이는 보도프로그램과 함께 드라마, 예능 등 일차원적이고 비사고적이며 비사유적인 이해를 요하는 매체 특성상, 그리고 무엇보다 ‘용이함’을 요하는 시청자들에게 소구되기 위해 만드는 이들을 무엇을 가치로 삼는가- 이전에 정보프로그램에 소개된 맛집을 찾은 바 있다. 신나게 튀기는 탕수육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양이라 즐겨 먹던 손님-실제로 찾아온 식당은 고된 노동에 지친 주인과 나처럼 여기저기서 모인 분주한 손님들로 즐겁기는커녕 푹 빠져 있었지만 맛은 평범했다, 그 경험으로 다시는 TV에 나온 식당은 가지 않는다.이처럼 TV는 진실보다는 겉모습과 포장에 더 치중한 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공분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지구를 중심으로 행성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측 자료를 다시 분석했다.그의 자료는 태양 중심의 지동설을 서술하고 있었다. 태양이 가운데에 있으며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순으로 행성이 배열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분석을 해놓고 정작 자신의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과학자로서 확신이 부족했는지, 지동설을 주장하는 순간 시작된 교회의 탄압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는지, 그가 지동설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엮은 것은 만년의 병석이었다.그가 세상을 떠난 뒤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발간됐다.훗날 그가 완벽하게 옳았음이 증명되고 지동설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발상의 대전환을 촉발하는 사건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비유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을 그는 모른 채 눈을 감았다.201 – 잘 알려진 천문학자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전과 거대한 발견이라 할 수 있는 지동설은 이렇게 탄생한다.천문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장 작게 상정하고 가장 먼 거리를 관측해 그곳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지각시킨다.나는 종종 내 손안에 들어온 스마트폰과 얇든 뭐든 해내는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어도 깜짝 놀란다.그것도 매우 비싸지 않은 가격에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쉽게 누리는 기술 발전은 과거에 어떤 상위 계층이 누렸던 것 그 이상이다.하지만 이렇게 발달한 기술에 비해 우리는 아직 ‘지구’와 지구가 존재하는 ‘우주’라는 거대한 미지의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심지어 그에 맞물린 어떻게 ‘인류’가 탄생했을까 하는 수수께끼까지-몇 광년 되는 먼 거리의 우주를 관측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그리고 현실, 한 인간이라는 존재 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우주로 나가 보이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 경탄하고 먼 거리에서 보면 지금 직면한 현실적 문제가 대수롭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학문적 이성이 현실의 감성을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우주적) 감성이 (현실적) 이성을 빼앗았을 정도로 무례하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기엔 인간사는 단순하지 않으니까.이러한 직접적 비유와 주장이 나타났다

서양식 과학을 무조건 맹종할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전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파급력을 갖게 됐는지 관찰하고 탐구해볼 필요는 있다.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자체가 학문적 태도다. 신기하고 새로운 현상을 배우고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그 이유를 알기 위해 많은 사람이 수세기에 걸쳐 지식을 쌓는 것, 끊임없이 검증하고 반박하고 새로운 근거를 더하는 것, 나의 생각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을 대학에서 배워야 한다. 58

대학이 이들에게 배운 것보다 배우는 즐거움과 고통을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일깨워 주기 바란다.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눈을 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그 즐거움과 고통을 「우주의 이해」에서도, 「작문의 이해」에서도, 「시민교육」이나 「전자역학」, 「천체물리학 개론」에서도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어쩔 수 없이 대학을 다녀야 한다면 대학졸업장이라는, 그 한없이 틀에 박힌 문서 하나가 주는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칠 수 있기를, 넘쳐나길 바란다. 63-시적 허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배움과 성찰, 낭만을 기대하고 실천하면 바보가 되는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자의 낭만이 너무 태연하게 꾸밈없이 놀랍다.지금보다 취업이 어렵지 않았던 나의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면 더 치열한 전쟁터에서의 투쟁과 이기심으로 뭉쳐 있는 대학생들. 혼족, 혼밥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이라 삼삼오 모여 밥을 먹고 강촌으로 MT를 가서 종강파티를 하던 그 시절은 그나마 남아있던 대학이라는 낭만의 칙함을 최대한 모은 마지막 축제였다.하지만 사람이 올라가면 내가 추락하는 이 어려운 현실에서 그 사회 진출의 출발선에 자세를 잡고 선 출전자들에게 호기심을 잃지 말고 배움의 진수를 잃지 말라는 말은 원칙에 근거한 조언이나 그 무관심함이 읽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석사 이상은 올라가야 효력을 발휘하는 분야가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대부분 학사로 마친 성취를 갖고 사회에 진출한다.교양 수업에서 천문학 강의를 듣는 이런 평범한 학사과정을 마치려는 이들에게도 이 조언은 과연 도움이 될까.

나는 좋아하는 록밴드의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언니에게 강제로 들려주면서 좋지? 괜찮지?”라고 연발하기도 했다.그러자 음악 취향이 나왔고, 꽤 나른한 언니는 어쩔 수 없이 몇 초 듣는지 묻지 않겠다는 듯 “좋아요”라고 짧게 한마디 해 납득해주기도 했다.하지만 내가 그런 상식 없는 일을 몇 년이고 반복하자 어느 날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 아, 내 감동은 나만의 것이었다. 내가 <코스모스>를 읽을 때의 모습은 동생이 달아준 이어폰을 차마 놓지 못했던 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좋은 작품이고 대단하다는 건 알겠지만 뭐 꼭 나까지 그렇게 함께 좋아해야 하느냐는 바로 그 표정이다.칼 세이건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대단한 선동가였다. 85-발칙한 우주 산책

<코스모스>는 과학책이라기보다 과학자가 쓴 인문학 에세이에 가깝다.전문 과학자가 보기엔 이 책은 과학서적보다 멀리 떨어진 칼 세이건의 바람과 꿈이 담긴 한 권의 문학으로 볼 확률이 높다.비이과생에게 이 책은 조금의 어려움만 극복해도 읽을 수 있는 재미와 흥미가 가득 담겨 있다.그러나 그 실체에 비해 <코스모스>라는 책이 다소 과대평가된 것에 동의한다.같은 분야에 있는 과학자들이 보기에는 이 책이 다소 걸리는 것은 이해하지만 뭐, 모두가 (본인처럼) 과학자는 아니니까.

부모 중 한 명이 가사와 양육을 맡거나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조부모 등 친척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녀 한 명을 키우기가 어려운 사회. 그렇다, 현실이 그렇다고 백 번 인정한다. 그것이 현실이지만 그것이 여자들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슬프다.직장에서 그토록 프로페셔널해야 한다면서 가정에서의 의무는 가볍게 보는 아이러니가 뭘까.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문화에 적응해 나가듯, ‘직장맘’들이 ‘자녀는?’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하듯이 그들도 여성들, ‘직장맘’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면 좋을 것이다.108 – 최고의 우주인

육아 부모끼리 남녀 간 분업은 반드시 필요하다.적어도 남성이 2세를 더 원한다면 (임신이나 출산은 여성의 신체적 희생을 요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일터에서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을 구두쇠로 보는 회사와 대부분의 육아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육아의 책임을 여성에게 모두 부여했다면 직장에서의 출산 및 육아 복지 혜택이 풍부해야 하고, 직장에서 성별 구분 없이 프로페셔널함을 요구한다면 사회적으로 육아의 책임을 한쪽 성에 중점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실 ‘자녀’는 가족의 일원을 생산하는 가정의 일이자 사회의 일원을 탄생시키는 사회적 사건인데, 애초에 부모 개인의 선택. 지금에 모든 육아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는 원인은 모든 육아를 ‘부모’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육아 관련 사회적 책임 부재에 있다. 모든 비용과 수고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국가 및 사회가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매우 쉬운 사회적 비용의 해결 방법이다.하지만 간혹 육아에 지친 부모들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고 토로하는 외로움에 가끔 혀를 내두를 때가 있다.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면 주변에서 고생이라는 위로의 말뿐 실제 도움이 없다는 말은 이런 고생을 처음 보는 남들이 도와야 한다는 신기한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아이의 양육 후 오는 성취와 보람은 부모가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 아니거나 남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의아함은 출발한다. 연애, 결혼도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을 주입하는 순간 관계가 왜곡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OO하기를 바라는 이기심은 어디에서, 어떻게 기인하는가-이런 부모들의 이기심이 과도하게 발현될 때 사회문제로 대두된다.저는 그 ‘선택’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 뒤에 올 행복에 대해 냉정하게 인지해야 이런 사회적 문제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조카 바보라는 말이 얼마나 무지하게 들리는지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다. 조카가 ‘아이’가 됐을 때 따라오는 책임감, 그것이 가볍게 사라진, 오로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밝은 면만을 취득해 쫓아낼 수 있는 3촌 이상이 가진 그 특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어쩌면 사람들은 대단한 과학자들을 집중 조명하고 싶어한다.고난을 극복한 영웅담에 빨리 감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과학자를 많이 키우고 그중 한 명이라도 대단한 과정을 지지하거나 지켜보는 것은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어디서 껑충 뛰쳐나올 리 없다.146 인터뷰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방송국 놈들이라는 단어가 통용된다.사실보다 더 부풀리고 극적이고 과대하며 대중에게 제시하고 종종 책임도 포기하는 그 방송국 놈들-한국은 적지만 미국에서 TV라는 간단한 미디어의 의존성은 사실 저소득, 저교육층에서 비례한다.단순한 주입을 요하는 텔레비전은 책과 같은 매체보다 낮은 이해 수준과 높은 접근성을 요하기 때문이다.이는 보도프로그램과 함께 드라마, 예능 등 일차원적이고 비사고적이며 비사유적인 이해를 요하는 매체 특성상, 그리고 무엇보다 ‘용이함’을 요하는 시청자들에게 소구되기 위해 만드는 이들을 무엇을 가치로 삼는가- 이전에 정보프로그램에 소개된 맛집을 찾은 바 있다. 신나게 튀기는 탕수육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양이라 즐겨 먹던 손님-실제로 찾아온 식당은 고된 노동에 지친 주인과 나처럼 여기저기서 모인 분주한 손님들로 즐겁기는커녕 푹 빠져 있었지만 맛은 평범했다, 그 경험으로 다시는 TV에 나온 식당은 가지 않는다.이처럼 TV는 진실보다는 겉모습과 포장에 더 치중한 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공분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지구를 중심으로 행성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측 자료를 다시 분석했다.그의 자료는 태양 중심의 지동설을 서술하고 있었다. 태양이 가운데에 있으며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순으로 행성이 배열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분석을 해놓고 정작 자신의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과학자로서 확신이 부족했는지, 지동설을 주장하는 순간 시작된 교회의 탄압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는지, 그가 지동설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엮은 것은 만년의 병석이었다.그가 세상을 떠난 뒤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발간됐다.훗날 그가 완벽하게 옳았음이 증명되고 지동설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발상의 대전환을 촉발하는 사건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비유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을 그는 모른 채 눈을 감았다.201 – 잘 알려진 천문학자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전과 거대한 발견이라 할 수 있는 지동설은 이렇게 탄생한다.천문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장 작게 상정하고 가장 먼 거리를 관측해 그곳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지각시킨다.나는 종종 내 손안에 들어온 스마트폰과 얇든 뭐든 해내는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어도 깜짝 놀란다.그것도 매우 비싸지 않은 가격에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쉽게 누리는 기술 발전은 과거에 어떤 상위 계층이 누렸던 것 그 이상이다.하지만 이렇게 발달한 기술에 비해 우리는 아직 ‘지구’와 지구가 존재하는 ‘우주’라는 거대한 미지의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심지어 그에 맞물린 어떻게 ‘인류’가 탄생했을까 하는 수수께끼까지-몇 광년 되는 먼 거리의 우주를 관측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그리고 현실, 한 인간이라는 존재 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우주로 나가 보이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 경탄하고 먼 거리에서 보면 지금 직면한 현실적 문제가 대수롭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학문적 이성이 현실의 감성을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우주적) 감성이 (현실적) 이성을 빼앗았을 정도로 무례하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기엔 인간사는 단순하지 않으니까.이러한 직접적 비유와 주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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