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비가 오는 날이 많아졌다. 지난해 기록한 51일에 비할 바 못되지만 비가 내리는 횟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도 이제 동남아처럼 열대지방으로 옮겨가는 듯하다. 메밀국수 냉면을 생업으로 하는 친구들은 비가 와서 장사를 망쳤다고 불평한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거역할 수는 없지만 아쉬움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누군가는 넓은 창문이 있는 찻집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상상을 하곤 한다. 빗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운치 있는 장소를 찾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여유 있는 찻집보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운 막걸리 집을 찾는 것이 일상화됐다. 비가 오는 주말이면 집 앞 막걸리집은 대기표를 받아야 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지금까지 해왔던 일상이 점점 달라져, 생각도 나이를 먹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보는 시야도 좁아지고 생각도 작아지는 게 일반적이다 한 강연에서 들은 말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참가하는 배드민턴 모임에서도 예전에는 6, 7게임을 해도 몸에 무리가 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3, 4게임을 해도 몸에 무리가 와 힘들다. 무리해서 몇 게임 더 할 수 있지만 내일 아침 느껴야 할 근육통의 아픔이 먼저 머릿속으로 다가온다.나이 듦이다.
중년이라는 연령대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45세에서 60세 전후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고비를 넘기는 시기다. 아이들은 대학을 다니거나 군대를 가는 시기로 여전히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이고 회사에서는 중간관리자 또는 작은 결정권만 가진 위치에 있으면서 웃음 없는 일상을 보내기 일쑤다. 그래서 이 시기가 가장 일탈이 많고 나를, 완전히 나로 알아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시기이다.
” 우리 나이에는 원하는 삶을 즐기는 것이 최고다. 하고 싶은 걸 해야지얼마 전 필리핀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한국에 돌아온 선배가 술잔을 건네며 한 말이다. 그는 꽤 사업 수완이 좋아 필리핀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해 돈도 꽤 벌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한국에서 여유 있게 보내기 위해 필리핀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것이다.
” 형은 돈이라도 많이 벌었으니 즐길 줄 알지만 전 아직 애들도 돌봐야 하고 노후 돈도 마련해야 해요.너무 아이들에게 매달리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 나중에 후회할 거야.”
나도 후회할 걸 알아. 지금 이 생활이 너무 힘들고 힘든데 선배의 그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는다. 중년의 인생은 너무 비참하다. 적어도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벌어오는 돈을 대부분 학원비로 써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보내기 위해 또 다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나에게 쓰는 돈은 가끔 친구들과 마시는 막걸리 값이 전부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은 마이너스 통장 잔고를 메우기에 바쁘고, 경조사라도 있는 달에는 얼마를 해야 할지 계산하기에 바쁘다. 저지른 죄도 없는데 다른 집 아이들보다 서툰 학원에 보내면 미안하고, 아버지의 기회를 이용해 좋은 직장에 들어간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왠지 말을 잇지 못한다. 중년이 되어도 여전히 내 인생은, 나만의 인생은 먼 나라 이야기로만 다가온다.

장마가 시작되는지 비가 세차게 내린다. TV에서는 밤 사이에 150mm가 넘는 비가 내린다고 한다. 메밀국수 장사를 하는 친구들은 오늘도 하늘 탓을 하며 한숨 섞인 말을 내뱉을 것이다. 창가 넓은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만의 여유를 즐기는 건 내게 사치스러운 것 같다. 차라리 시끌벅적한 막걸리집에서 테두리가 타버린 부침개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내 푸념을 늘어놓는 편이 나을 듯하다. 막걸리 기운이 온몸에 퍼질 무렵 메밀냉면 파는 친구를 불러 함께 우리 중년을 흐리게 한다.